1. 소설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묵묵히 생활인으로써 써나가는 사람이다. 그가 소설을 세워나가는 시간 속에 소설가도 함께 모색하고 성장하고 다듬어진다. 그는 다만 작품으로, 인생 전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간절하고 맹목적이며 헌신적이지 않은 글은 더이상 젊은 글이 아니다. #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28)2. 창작윤리를 비롯해 소설가의 자괴감이 운운되는 때에 이 책을 펴든 이유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 윤리와 소설가로서의 자존감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음식물쓰레기 같은 초고를 살리는 작업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끌어안고 다시금 싸워보거나 도약할 기회를 주는 일일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형편없음을 마주하고도 지속해 자신을 쓰도록 밀어 넣는 행위는 ‘나아짐’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발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속 살아/쓰고 있음이, 그 자세가 그에겐 중요한 듯하다. 살면서 겪는 도돌이표와 제자리걸음에도 우리가 소설의 이야기에 감동받고 매혹되는 포인트를, 인생과 소설 창작물을 나란히 두고 설파한다. # 인생 역시 이야기라면 마찬가지리라.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41)# 이 모든 생고생이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장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다는 걸 아는 순간, 구멍에 불과했던 단순한 욕망은 아름다운 고리의 모양을 지닌 복잡한 동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47)#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51)3. 소설가가 쓴 수필이나 작법책을 읽다가 감동을 받는 경우는 소설에 대해 말하는데 삶이 겹쳐 보이고 이해가 될 때이다. 소설은 주인공과 주변을 다루니 어쩌면 당연한 속성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번 장에서 어떻게 소설이 시작되는지 기본적인 질문들을 거론한다. 바로 ‘왜?’ ‘어떻게?’가 디테일과 입체성을 부여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건(대체로 불행)에 대해 ‘왜 하필이면!’ ‘설마 그럴 줄이야!’의 호소와 감정이입으로 이야기를 짜나간다.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는 개연성을 갖추지만 번듯한 소설이 되려면 곧 있을/생길법한 ‘핍진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자면 염력대사전에서 자주 접하지 않는 정확한 어휘와 표현을 찾아내 자리를 마련해주는 섬세한 공들임이 요구된다. 같은 듯 다르고 어디에도 없는 허를 찌르는 언어로 다시 쓰는 퇴고와 사유가 불가피하다. #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소설가는 모든 질문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핍진성 있게 대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82; 84)4. 장편소설은 대개 3막 정도로, 두 세 번의 플롯 포인트(대박 사건)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인생 같지 않은가. 건너온 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타는 다리”를 실제로 두세 번은 겪을 듯하다. 무엇보다 건너보고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게 포인트(전환점)라는 걸 판독할 수 없다는 점도 일치한다. 쓰지 않고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것처럼, 많은 에너지를 엉뚱하게 써온 사실이 확연이 드러나 부끄러웠다. 나란 사람은 인물 중심의 (황희 정승형) 판을 짜왔나, 아니면 플롯 중심으로 삶을 굴러왔나 문득 돌아보게 한다. 일단 쓰고 토 나올 때까지 새로 쓰고 다듬어나가듯, 삶도 행동(액션)으로 이어질 때만 “변화의 곡선”을 그릴 수 있겠다. 음악에 나를 실어 보내고 만나고 헤어지듯 그렇게 시절 인연이 있듯이, 인생이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뭔가 시도해보고 끝까지 우선 해볼 일이다. 반성과 고침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98)5. 이쯤 되면 소설을 쓰고, 소설을 읽는 일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인간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를 열어두고 다시 쓰는/사는 이야기라니. 소설을 읽다가 “아아악~ 그냥 말을 하란 말이야!”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 주인공은 기존의 진부한 표현이 아닌 새로운 ‘말’을 찾아 표정과 몸짓과 행동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절대 “대놓고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관과 삶을 해석하는 뇌구조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이상, 위의 고유한 극적 전개는 희박하다. 죽을 때까지 어떤 인간으로 남을지,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건, 꿈꾸길 멈추지 않는 건 소설인물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반짝임이자 뮤즈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소개한 우디 앨렌과 헤밍웨이의 뮤즈나 구원 신화는 미투 시대를 맞이하여 재점검되어야겠지만(좋아하는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도 뮤즈가 아닌 메이커(창조 주체)를 꿈꾸는 시대이니까). #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짓이 바로 그의 세계관이다...말은 그 속성상 관계 속에서 속내를 왜곡한다. 진짜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싶다면, ‘표정, 몸짓,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121; 128)6. 소설 작법을 읽다보니 또다시 어떤 스토리와 캐릭터가 공감과 감정이입을 부르는지 공통점이 모아진다. 소설은 어둡고 음침하고 습한 곳에 어떤 의미의 ‘빛’을 비추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실패와 좌절과 생고생으로 가득 찬 삶이 우려내는 감성적인 터치와 판단 보류의 지점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나 싶다. 소설가/저자는 악행을 다룬 이야기는 “카인 이야기의 표절”로 논리도 빈약하고 천박한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보고 선함을 추구하는 이야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 전락보다는 ‘회복’ 이야기의 소설적 기능과 인간적인 교훈을 강조한다. 이에 반론 제기! 아시겠지만 필립 로스의 경우 회복으로까지 가는 문을 열어놓지 않고 전락에서 이야기를 끝내지만 그의 소설은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며 깊이 사유하도록 이끈답니다. 작가는 과한 욕망에 불타는 종이 인형 캐릭터를 염두에 두며 가급적 선한 기운과 한 번 더 노력을 기울인 이야기를 추구할 것을 권한다. # 하지만 선(사랑)의 이야기는 모두가 오리지널이다. 만약 소설을 쓰는데, 뭔가 파괴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좀더 어렵고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게 좋겠다. (159)# 나는 알게 됐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쉽게 감정이입하는 이 마음은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걸. 다만 이 마음은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 사람. 모든 걸 걸고 이야기의 중심으로 향하는 사람,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모든 걸잃을 사람이 누군지만 알 뿐이라는 걸. (160)7. 삶은 인간사에서 지속해 이어졌고 소설도 계속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담는 내용보다는 ‘형식’과 창의적인 표현이 더욱 중요해진다. 소설의 생명수는 문장이 된다. 누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르게 담아내느냐. 세밀한 관찰과 색다른 경험 감각을 살린 미문에 독자는 구세주를 만난 듯 감탄하고 받아 적고 암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 추잡한 문장은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174)# 문학의 문장은, 그렇게 해서 비극 앞에서 웃는다. 웃는 문장이 문학의 문장이다. (186)8. <소설가의 일> 중 가장 오감을 열어 읽게 되는 <펄펄 끊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파트이다. 가끔 독서 감상문이나 에세이를 읽다가 ‘넘나 소설적’이라 거부감이 들 때가 있다. 감정의 소용돌이까진 참겠는데, 온통 세상이 자신을 두고 돌아가는 듯 접근하는 자의식 과잉과 지나친 에고가 불편해 손사래를 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작법책을 읽다보면 이해된다. 소설은 플롯과 캐릭터에 못지않게 문장이 중요해진다. 한번이라도 소설을 써본 소설가 지망생들에게는 (본능적인 반응으로) 더할 것이다. 시간의 압박을 견뎌 여기까지 당도한 소설은 문장의 비범함과 혁신을 백으로 두고 있다. 앞 장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생각을 차단한 채 세상에 다시없을 감각적인 문장 ‘발견가’가 먼저 될 것을 권장한다. 죽었던 표현을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릴 감각어! 과거는 ‘안다’, 현재는 ‘산다’, 미래는 ‘모른다’는 공식 아래, 알고 쓰려 들지 말고 쓰면서 토고를 통해 배운 것을 토대로 정성껏 수정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 과정에서 단어와 문장의 형체, 즉 몸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일깨운다. 새삼 그가 단어와 문장 앞에 오래 서성이는 자, 세심히 집도하는 스토리닥터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소설은 그가 자신을 떠나 감각과 감정을 곤두 세워 일군 이야기집이다. 지역과 역사와 삶을 아우르는 유체이탈과 성실한 걸음이 수반된다. 그런가하면 보는 대상과 스치는 풍경을 오롯이 사랑하고 깊이 앓는 소설가이자 살갗 냄새를 소중히 하는 땀 흘리는 문장가이다. 여기까지는 원래 알고 있었던 바이고, 그는 정치, 역사, 평화 칼럼과 소설도 언젠가 써낼 사람이라는 예감이 든다. 뭐든 쓸 준비가 된 소설가에게 이제 천천히 오래 쓰는 일만 남았다고 할까. 그가 현장성과 역사의식이 담긴 맑은 물잔을 대접하는 소설가라는 확신이 든다. # 그러니 소설을 쓰겠다면 생각하지 말자. 쓰고 나서 생각하자. (199)# 아는 사람은 (소설을) 쓰지 못하고, 쓰는 삶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느끼려고 할 뿐. 더 많이 느끼고 싶다면, 늘 허기지게. 늘 바보처럼 굴어야 한다. 미식가보다는 지금 앞에 놓인 이 평범한 일상을 강렬하게 맛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학술적으로 아무리 떠들어봐야 한 번 나를 안아주는 것만 못하다. 그건 못해도 너어어어무 못하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소설가는 늘 이 감각적 세계에 안기기를 갈망해야만 할 일이다. (★223-225) 9. 소설가가 일인칭시점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기란 한번으로 충분하며, 가급적 오래 공들여 쓰는 이인칭과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 교차하는 소설이 이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충고한다. 세상의 복잡하게 얽힌 다층적 의미와 맥락을 글에 반영하고 고통 속의 인간과 구원의 서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분명 소설가는 누에 껍질을 벗고 세상 밖의 ‘눈’을 획득한 창조자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 누구에게나 이런(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의 일들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으로 틀리는 일이 없이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재해석된다. (242)10. 산문 연재를 마치고 퇴고하는 작업 중에 작가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흘러 그는 이제 고아가 되었을까. 문득 스치는 제부의 말 한마디. “제게 장모님밖에 더 있나요.” 그 순간 그의 목소리에서 친자식보다 더한 애틋함의 울림을 듣고 말았다. 작가는 인간의 생은 유한하고 “웃는 듯 우는” 희비극의 형상이라고 술회하면서 결국 좌절과 실패로 끝나는 삶이라고 잔뜩 흐리게 말한다. 그런데 끝까지 들어볼 것이 ‘혹시’ 잊고 살지 않냐는 물음이 붙는다.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기는, 이 시간은 앞선 누군가가 그토록 원하고, 목숨까지 던져 지키고자 했던 꿈이었음을. 인간은 죽음이라는 새드엔딩을 치르게 되어 있지만 인류는 엔드로피 법칙에 저항하며 더디지만 점차 빛으로 향해가는 나름의 기적을 쓰고 있다. 그것도 웃는 문장으로. # 아프니까 청춘이었다가 아프니까 중년이었다가 아프니까 말년이었다가 아프니까,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254; 262)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김연수의 신작 산문집 소설가의 일 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 떠오른다. 산문은 모든 예술을 포괄한다. 한편으로 단어는 그 안에 온 세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자유로운 단어는 그 안에 말하기와 생각하기의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을 쓸 때보다 자유로울 단어들로, 김연수는 이 책에서 생각하기와 말하기, 쓰기뿐 아니라 어떤 삶의 비밀/태도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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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제1부 열정, 동기, 핍진성
재능은 원자력 발전에 쓰는 건가요?
욕망에서 동기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게 한다
플롯과 캐릭터보다 중요한 한 가지: 핍진성
제2부 플롯과 캐릭터
다리가 불탔으니 이로써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
욕망의 말에 불타지 않는 방법은 조삼모사뿐
절망보다 중요한 건 절망의 표정 및 몸짓, 그리고 절망 이후의 행동
제3부 문장과 시점
문장,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지는 것
펄펄 끓는 얼음에 이르기 위한 5단계
전지적 작가가 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소설 쓰기
마치는 글
그럼에도, 계속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이유
카테고리 없음